우리는 흔히 인류가 수렵채집을 끝내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삶이 훨씬 풍요롭고 위대해졌다고 배웁니다. 벼와 밀을 재배하면서 식량이 늘어났고, 한곳에 정착하면서 거대한 문명을 세울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최신 연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반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으로의 전환을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실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농경의 시작은 인류에게 축복이었을까요, 아니면 화려하게 포장된 덫이었을까요?
수렵채집인이 농부가 되며 잃어버린 것들
제가 역사 자료를 분석하며 가장 먼저 주목한 변화는 바로 '노동 강도'와 '신체의 손상'입니다. 2편에서 살펴보았듯, 수렵채집인들은 하루 3~4시간만 일하면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된 인류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질 때까지 허리를 굽혀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내고, 무거운 물을 길어 날라야 했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원래 고정된 자세로 하루 종일 밭을 갈도록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 고대 정착지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보면, 수렵채집 시대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디스크, 관절염, 척추 변형 같은 심각한 노동 흔적들이 무더기로 발견됩니다.
인류는 식량을 늘리는 대가로 자신의 뼈와 근육을 갈아 넣어야 했던 셈입니다.
단일 식단이 불러온 영양 불균형과 전염병의 습격
두 번째 문제는 '식단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수렵채집 시절에는 수백 가지의 과일, 견과류, 고기를 골고루 먹었기 때문에 영양 상태가 좋았습니다.
반면 농경 사회가 되면서 인류는 자신들이 재배하는 한두 가지 주작물(밀, 쌀, 옥수수 등)에 식단의 90% 이상을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칼로리는 채웠을지 몰라도 비타민과 미네랄 결핍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죠. 이로 인해 인류의 평균 신장은 수렵채집 시대보다 오히려 작아졌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전염병'이었습니다. 수십 명 단위로 이동할 때는 전염병이 돌더라도 다른 무리로 퍼지기 전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수천 명이 좁은 공간에 모여 살고, 돼지나 소 같은 가축을 우리에 가두어 함께 생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같은 인류를 괴롭힌 수많은 치명적인 질병들이 바로 이 농경 초기, 가축과의 밀접한 접촉과 정착 생활의 불결한 위생 환경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왜 농업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이 고단하고 병약한 삶을 살면서도 인류는 왜 다시 과거의 자유로운 수렵채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개인의 삶의 질은 떨어지지만, '단위 면적당 먹여 살릴 수 있는 인구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수렵채집으로는 100명밖에 못 살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1,000명, 10,000명이 살 수 있게 됩니다. 인구가 한 번 늘어나고 나면, 다시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수천 명의 인구가 굶어 죽어야 하는 외통수에 걸리게 됩니다.
결국 인류는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농사라는 굴레를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습니다. 먹고 남는 곡식이 생기자 이를 보관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생겼고,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정치가, 군인, 장인 같은 전문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은 더 불행해졌을지 모르지만, 인류라는 '종(Species)' 전체로 보면 문명을 건설하고 지구를 지배할 진짜 원동력을 얻은 순간이었습니다.
핵심 요약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노동 시간을 비약적으로 늘렸고, 디스크와 관절염 등 신체적 고질병을 남겼습니다.
단일 작물 위주의 식단으로 인해 영양 불균형이 발생했으며, 집단 정착과 가축 사육으로 인해 대규모 전염병이 시작되었습니다.
삶의 질은 낮아졌으나 인구 부양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인류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대 문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 예고
인구가 늘어나고 정착 생활이 고착화되면서 인류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인류가 정착지에 모여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조건
왜 초기 거대 문명들이 하필 '거대한 강줄기' 주변에서만 싹을 틔웠는지 그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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